‘음… 이 조명, 온도, 습도… 모든 게 행정복지센터군!’
내가 맡은 업무는 자생단체, 또는 직능단체라고 불리는 각종 주민조직과 마을 통장님들을 관리하는 일이다(농촌지역으로 분류되는 읍, 면에는 ‘리’ 단위가 있어 ‘이장’이 된다). 직능단체는 종류도 다양하다. 새마을회, 부녀회, 바르게살기협의회, 주민자치회, 체육회, 청년회 등등. 단체별로 세자면 200명이 넘는 숫자지만, 실은 동시에 서너 개 단체에 동시에 발을 걸친 분들이 상당수다. 이 단체들은 뿌리가 깊고 단결이 잘 되어 있어 기동력이 좋다. 단체장의 “모이세요!”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수십 명씩 나타나 든든한 행정의 지원군이 되어 준다.
우리 동은 16명의 공무원이 24,000명을 주민을 응대해야 하니 공무원 1인당 주민 수가 1,500명이 넘는다. 통장님들과 직능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일할 수 없는 구조다. 행정복지센터 일은 5할이 직원, 5할이 직능단체의 몫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니 이분들과 얼마나 긴밀하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행정의 관건인 셈이다. 이런 단체의 어른들은 주민들이 알아야 할 각종 정보를 공무원 대신 전파하는 일은 물론이고, 연말이면 김치를 담가 취약계층에게 배달하고, 명절을 앞두고 거리 대청소를 하고, 자율적으로 팀을 꾸려 야간 순찰에 나서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정말 돈도 안 되고 귀찮기만 한 일들을 왜 이렇게 성실히들 하시는 걸까. 삼삼오오 모여서 좋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니 좋고, 여전히 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서 좋은 걸까. 잘은 모르지만 그 어른들의 얼굴에는 늘 기쁨이 있다.
내가 그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치러야 할 것은 고작 이런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사무공간에 드나드는 부모님 연배의 어른들을 맞이하고 응대하기. 오늘은 이 단체 모임에 껴서 수다 떨고 커피 마시기. 내일은 저 단체와 점심 먹기. 그러느라 일주일 동안 돈 한 푼 쓰지 않은 적도 있다. 한때는 일과 중 유일한 휴식시간인 식사시간마저 부모님 연배의 어른들과 불편하게 보내야 한다는 게 싫었다. 나도 또래 직원들과 밥을 먹으며 오전은 뭐가 어땠고 오후는 뭐가 바쁘다며 쫑알쫑알대고 싶은데. 코다리찜 말고 파스타 먹고 싶은데. 쌍화차 파는 찻집 말고 감성카페에 가고 싶은데!
하지만 고물가 시대인 요즘엔 좀 생각이 다르다. 저소득 근로자이자 1인 가구로서, 우리 담당 직원이니 밥이나 같이 먹자는 그 제안이 은근히 반갑다. 오늘은 연말을 앞두고 모 단체 회원님들이 올해 마지막 저녁식사 모임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집에 가 혼자 부엌에서 사부작거려 봐야 그다지 건강한 음식을 해먹지 못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식사 장소에 갔다. 밥에 커피까지 얻어먹고 헤어지려는데 어느 아저씨 회원 분이 “어이, 오늘 고맙네!” 하셨다. 실컷 얻어 먹고도 와줘서 고맙다는, 잘 먹어서 좋다는 칭찬을 듣는다. 자식 또래의 직원에게 그분들이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살갑게 손 한번 잡아 드리기. 어쩌다 밥 한끼 맛있게 얻어 먹기! 그분들로부터 쏟아지는 귤과 떡을 잘 챙겨 먹기. 이것은 행정복지센터의 직원의 복지다. 행복해서 행정복지센터다!
순천시 주무관. 대학시절을 포항에서 보내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만년 지방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글을 쓴다. <제주방랑>, <권수정 산문집> 등 세 권의 독립출판물을 냈고 3년째 여수 MBC 라디오에서 매주 책을 소개하고 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던 도시에 벌써 5년째 살고 있다. 때때로 상경한 친구들이 부럽지만 아무래도 지방이 몸에 맞는 걸까. 탈지방, 탈다이어트. 왠지 해야 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들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