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친구들에게 묻는다.
“넌 소원이 뭐야?”
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소원부터 가족 여행, 세계 평화를 비는 소원까지. 친구들은 다양한 소원을 꺼내 놓는다. 그중 한 친구가 답한다.
“나는 엄마 아빠가 안 싸우는 게 소원이야.”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들이 차례로 말한다.
“너희 엄마 아빠도 자주 싸워? 우리 엄마 아빤 맨날 싸우는데.”
“사실 나도 그게 소원이야.”
“나도 소원 그걸로 바꿀래.”
“엄마 아빠가 싸울 때 넌 어떻게 해?”
“난 말이야...”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 만들고 있는 영화의 도입부이다. 1학년들은 아직 한글을 익히는 중이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럴 땐, 영화로 만들고 싶은 그림책을 함께 골라 이야기를 각색하고 등장인물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곤 한다. 그래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직접 만든 이야기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기에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 만들기 수업을 시도해보고 있다. 이번에도 연습 삼아 한차례 시도해 본 다음, 도서관으로 가서 마땅한 책을 고르게 할 계획이었다.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사건’과 ‘감정’이란 개념을 배워보았다. 키즈카페에서 생긴 사건, 그때 느낀 감정, 멀리 나들이 가서 내가 본 것, 그때 느낀 감정들을 나누었다. 나들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가 싸운 이야기로 흘러갔다.
“엄마 아빠가 싸우시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질문하자 아이들은 “무서워요.”, “걱정돼요.”, “슬퍼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답하던 아이들이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다투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구나...’ 안심하며 서로의 이야기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공감을 하는 듯했다.
“선생님도 어릴 때 소원이 엄마 아빠 안 싸우는 거였는데... 근데 있잖아... 사실 지금도 그게 소원이다.”
아이들은 놀라움과 위로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럼 부모님이 싸우실 때 너흰 어떻게 해?”라고 묻자, 엄마 아빠를 말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었는지 무용담이 이어졌다. 배고프다고 한다, 벌레가 나타났다고 한다, 동생이 아프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전 안 말려요. 형이랑 같이 구경해요. 팝콘 먹으면서.” 친구들은 깔깔 웃었다.
“너무 재밌는데? 우리 이 이야기로 영화 만들어볼까?”
“네!!!!!”
아이들은 책상을 치며 환호했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 주로 어떤 말을 하는지 대사가 줄줄 나왔다. “나는 말도 못 해?”, “내가 뭐만 하면 맘에 안 든다며?”,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술을 마시지!”, “나는 일 안 해? 나도 힘들어!” 이런 찰진 대사들.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엄마 아빠가 되어 싸우는 장면을 연기했다. 날카로운 대사들과 달리 웃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은 귀엽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처럼 느껴졌던 어린 시절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눈앞의 이 작은 아이들도 같은 공포를 느꼈겠지. 얼마 전, “엄마 아빠, 싸우지 마!” 이음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성을 높였던 내 얼굴은 어땠더라... 그런 엄마를 바라보던 이음이의 표정은? 출산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싸우지 말자!”, “그럼, 당연하지! 절대 안 그럴 거야!” 남편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장면들도 스쳤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끝난다. 서툰 한글로 또박또박 쓴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엄마, 아빠 싸우지 마세요. 나는 속상해요. 그리고 무서워요. 사랑해요.”
촬영이 끝나고, 아이들과 고른 배경음악을 넣고, 편집까지 다 마쳤다. 지난 금요일 아이들에게 완성본을 보여주었다. 반응은 대만족이었다. 빨리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10년 넘게 영화수업을 하면서 ‘이 수업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수업일까?’ 수없이 되물었다. 협력을 통해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는 시간, 숨겨져 있던 끼를 발산하는 시간, 소중한 추억을 기록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면서 ‘치유’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다음엔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이제 그만 둘 때가 됐다고 되뇌었는데...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이런 선물을 받게 된다.
11월 17일, 학교 체육관에서 영화제가 열린다. 전교생과 교직원, 학부모들이 모두 모여 각반에서 만든 영화를 함께 보는 자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를 함께 만나게 될 그날 밤엔 우리가 서로를 꼬옥 끌어안아 줬으면 좋겠다.
이로운
10년 전,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살아보고 싶어 순천으로 왔다. 작은 초등학교 영화 선생님, 마을 도서관에선 그림책 선생님, 가끔은 캘리그라피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이 작은 도시에서 나의 쓸모를 알아봐 주고 불러주는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일 저 일을 병행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 순천생활 10년을 정리하며 <네 번째 서랍>이라는 작은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