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부서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이 한 명 있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정도밖에 많지 않지만 입사가 빨라 경력이 오래되었고, 그만큼 경험이 많은 데다 일도 잘 하고, 심지어 사회생활까지 잘 해서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책상을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서로가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의 전반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나는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독특한 습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전화를 먼저 끊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는 늘 누군가와 통화가 끝나고 나면 수화기를 든 채로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먼저 종료를 눌러 끊어진 것을 확인할 때까지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용건만 끝나면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누르는 성격 급한 나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시간이 아깝기도 한 일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물어봤다. “정말 궁금했는데, 왜 할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전화를 기다렸다가 끊는 거예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상대가 할 말이 남았을지도 모르고.., 툭 끊는 게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좀 기다린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지막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야박했을까. 3초 먼저 일해서, 5초 빨리 끊어서 뭘 하겠다고. 그 이후로 그를 따라 해보기로 했다. 전화가 끝나면 3초만, 아니 5초만 기다려 보자고.
어릴 적부터 불같았던 내 성격을 늘 걱정하던 엄마는 “져주는 게 이기는 거야.”라는 역설적인 말을 자주 했다. 난 “져주면 져주는 줄도 모르고 호구인 줄 안다니까!”라고 엄마의 말을 튕겨내곤 했지만, 한번 아니면 아닌 거라는 식의 단호한 성격이 스스로 피곤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딱 한 번만 지면 되는데, 딱 한 번만 숙이면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일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적도 많았으니까. 엄마는 알고 있었던 거다. 져주는 데엔 돈이 들지 않는다는걸. 하지만 끝내 이겨 먹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벌인 일을 수습하는 데엔 돈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하다는걸.
며칠 전에는 누군가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내가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든 게 단초였기에 딴에는 최선을 다해 사과했지만 돌아온 것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사소한 실수였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나는 내가 정한 마음의 총량을 다 써버린 것 같아서,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돌아서 버리기 직전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원망이 들려는 찰나,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져주는 게 이기는 거야.”
나는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켜 상대에게 다시 카톡을 보냈다. 자존심은 조금 상하지만 무어라 메시지를 적고, 전달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얼마 안 있어 답장이 왔다. 어른답게 굴지 못해 미안했다고. 답장을 받아 들고 생각했다.
'엄마, 내가 이겼어'
관계를 이롭게 만드는 일은 대부분 공짜다. 회사 복도를 오고 가며 나누는 인사, 업무차 전화를 걸었지만 일단 “식사는 하셨냐”라고 묻는 스몰토크, 그 전화를 조금 기다렸다가 끊는 것, 연말 연초면 비슷비슷하게 건네는 덕담, 각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까지.
삶을 사는 데에 왜 그리 많은 군더더기가 필요한 건지, 그냥 말없이도 마음을 알아주면 안 되는 건지, 별다른 진심 없이 건네는 말인 걸 알면서 왜 그런 말들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건지. 난 한때 그런 게 불만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효율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관계를 부드럽게 굴러가게 만드는 엔진오일과도 같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런 말들에 마음을 아끼지 않아보려고 한다.